16세(世) 취사공(炊沙公) 여빈(汝빈) 할아버지[ 호(號)는 취사(炊沙)]는 중파인 13세 홍천공의 증손(曾孫)이다. 15세(世) 효신(孝信)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명종11년 1556.09.11)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특히 문사에 능하여 붓을 잡으면 문장이 물흐르듯 했다 한다.
선조28년(160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했으며, 이조(李朝) 광해군(光海君)때, 감곡(鑑谷;영주시 부석면 감곡리;감실 )으로 퇴거(退居)하여 인수정(因樹亭)을 짓고 시문(詩文)으로 학덕이 높고 인품이 고매하여 은거후 후학사업에 주력하였고 말년에는 향토사 정리 및 편찬사업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이번 그 분의 취사문집 목판을 보고 또 한번 고개가 숙여지며 감탄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할아버지는 76세(인조9년 1631.03.28)에 돌아가시고 후에 사림(士林)에서는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配享)하였는데 그 상향문(常享文)에 "힘은 무너져가는 기강을 붙들수 있고 손으로 달리는 번개를 잡을수 있다. 사나운 범이 관문을 지키니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의로운 행동은 일성(日星)과 같이 빛나도다" 라고 했다.